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창세기 50:15-21
창50:15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창50: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창50: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창50:18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창50: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창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50: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오늘은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 시리즈 18번째 시간으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할 선은 지난 몇 주 동안 살펴보았던 정죄의 선이나 축복과 저주의 선보다 더 깊고, 더 은밀하고, 더 아픈 선입니다. 이것은 잘 드러나지 않지만,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선입니다. 그것은 바로 원한의 선입니다.
원한의 선은 단순한 분노가 아닙니다. 상처의 기억이 오래 굳어 마음의 경계가 된 것입니다. 억울함과 배신감, 분노와 두려움이 한데 엉겨 마음속에 세워 놓은 단단한 경계입니다. 우리는 말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저 사람만큼은 안 됩니다. 그 일만큼은 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아시겠지만, 저는 저 사람만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런 말은 믿음이 없어서 쉽게 내뱉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속에는 실제로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가 있습니다. 억울함이 있습니다. 배신감이 있습니다. 다시는 무너지지 않으려는 절박함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원한의 선은 상처 입은 사람이 더 이상 몸과 마음을 다치지 않기 위해 세운 마지막 방어선처럼 보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니까 원한의 선을 허물고 무조건 용서하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권면입니다. 이런 권면은 상처 입은 사람에게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붙잡고 있을 거야. 다 지나간 일이잖아. 믿는 사람이니까 용서해야지. 이런 말들은 얼핏 신앙적인 말처럼 들리지만, 상처 입은 사람을 더 깊은 상처의 자리로 밀어 넣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원한에 대해 다른 관점에서 스스로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나는 왜 내 마음에 이 선을 긋고 있는가? 내가 그어 놓은 선은 정말 나를 지켜 주고 있는가? 아니면 그 선이 나를 과거의 감옥 안에 가두고 있는가?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을 들고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 앞에 서려고 합니다.
요셉은 자기의 형제들에게 원한을 품을 충분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형들은 아버지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던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했습니다. 마침내 그를 구덩이에 던졌고, 은 이십 개에 팔아넘겼습니다. 요셉은 하루아침에 아버지에게 가장 사랑받던 아들이 낯선 땅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집트의 노예로 팔려 간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했습니다. 성실하게 일했지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요셉의 인생은 형들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단순히 마음이 상한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가족을 잃고, 고향을 잃고, 자유를 잃고, 청춘의 시간을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긴 고통의 세월 속에서도 요셉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이집트의 총리로 세우셨고 기근 때에 많은 생명을 살리는 사람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팔아넘긴 형들을 다시 만났고, 기근으로 고통받는 가족 모두를 이집트로 데려왔습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창세기 50장에는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버지 야곱이 살아 있을 때 형들은 그나마 안심했습니다. 아버지가 계시는 동안에는 요셉도 함부로 자신들을 해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자 형들은 두려워졌습니다. 왜 형들이 두려워졌습니까? 요셉이 복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창세기 50:15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형들은 왜 이렇게 생각했습니까? 그들이 요셉이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우리를 영원히 그날 구덩이에 넣은 사람들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요셉은 우리를 자기 인생을 망친 사람으로만 보고 있을 것이다. 요셉은 우리를 용서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복수의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참을 이유가 없어지면 반드시 갚는다. 힘이 생기면 갚는다. 내가 당한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갚는다. 이것이 원한의 선에 사로잡힌 사람이 가지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형들이 가졌던 이러한 두려움은 요셉의 마음을 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신들이 가졌던 원한의 논리를 요셉에게 투영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원한의 법정 안에서만 살아왔기에, 요셉도 같은 법정에 앉아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급해진 형들은 요셉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합니다. 창세기 50:17 당신의 형제들의 허물과 죄악 곧 그들이 당신에게 행한 악을 이제 용서하기를 구하나이다. 그리고는 형들이 직접 요셉을 찾아가 그 앞에 엎드리고는 우리는 당신의 종이라고 고백합니다. 수십 년 전 요셉을 팔아넘겼던 형들이 이제야 요셉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한 것입니다.
요셉에게는 마침내 자신의 원한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는 형들에게 원한을 갚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고 자신의 복수를 정당화할 만한 아픔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는 복수를 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때로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돌려주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반드시 우리가 착해서만은 아닙니다. 언제나 믿음이 좋아서만도 아닙니다. 어쩌면 복수할 힘이 없고, 기회나 상황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달랐습니다. 그는 이집트의 총리였고, 아버지도 돌아가셨습니다. 형들은 그의 처분만 바라는 신세였습니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형들을 감옥에 넣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원한이 가장 위험해지는 순간은 상처받은 사람이 힘을 갖게 되는 순간입니다. 원한이 힘을 만날 때, 오래된 기억은 복수의 칼이 되기 쉽습니다. 원한이 권력을 만날 때,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 둔 복수심이 고개를 들기 쉽습니다. 힘은 내 안의 원한을 갚는 것을 정당한 심판으로 착각하게 만듭니다. 내가 겪은 억울함을 갚는 것이 정의라고 믿으며,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창세기 50:19-20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요셉은 상처가 없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억울함이 없었던 사람도 아닙니다. 형들이 한 일을 잊어버린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형들이 자기를 해하려 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요셉은 형들의 죄를 없었던 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형들의 악을 미화하지도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얼버무리지도 않았습니다. 원한의 선을 허문다는 것은 악을 없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는 것도, 받은 상처를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요셉의 고백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형들의 악행마저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은 여전히 악이고, 죄는 여전히 죄입니다. 다만 인간의 악함이 하나님의 선함보다 크지 못하다는 고백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악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형들의 악만 보지 않았습니다. 그 악보다 더 크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죄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형들의 악행이 자기 인생을 결정하고 해석하는 마지막 문장이 되게 하지 않았습니다.
원한은 내게 상처 준 사람의 행동이 내 인생의 최종 해석이 되게 만듭니다. 그 사람이 내 인생을 망쳤다. 그 사람이 내 마음을 이렇게 만들었다. 그 일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물론 그 말이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원한은 상처 위에 자기만의 법정을 만들고 그 법정 안에서 자기 인생 전체를 해석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요셉은 원한의 법정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형들의 악을 인정했지만, 그 악이 하나님의 은혜보다 크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향한 악보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더 크다는 사실을 몸소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그의 고백이 바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라는 위대한 고백입니다.
그의 고백은 단순히 나는 복수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피해자이지만, 심판자는 아닙니다. 나는 상처를 받았지만, 하나님은 아닙니다. 나는 악을 기억하지만, 최종 판결자는 아닙니다. 나는 억울했지만, 복수는 내 자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리를 아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위대한 고백입니다.
원한의 선은 내 마음 안에서 그어지는 선입니다. 처음에는 상처 입은 나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세운 울타리처럼 보입니다. 그 선은 이렇게 속삭입니다. 너는 피해자다. 그러므로 심판할 권리가 있다. 너는 상처받았다. 그러므로 끝까지 미워해도 된다. 너는 억울하다. 그러므로 저 사람을 영원히 과거의 죄 안에 가두어도 된다.
하지만 이것은 원한의 선에 숨겨진 가장 무서운 함정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그 사람을 가두었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내 영혼도 그 원한의 감옥에 함께 갇히고 맙니다. 결국 원한의 선은 상대방을 향해 그은 선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내 상처를 앞세워 하나님께만 속한 심판의 자리에 내가 앉고, 내 영혼 둘레에 또 하나의 감옥을 세우는 선이 되고 맙니다.
원한의 선을 허무는 것은 내가 상처받지 않은 척 더 넓은 마음을 가지려는 노력이 아닙니다. 내 분노와 감정을 억지로 억누르는 수양이나 훈련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심판의 권한을 온전히 넘겨드리는 것입니다. 요셉이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라고 말했을 때, 그는 형들만 죄의 굴레에서 풀어 준 것이 아닙니다. 자신도 상처의 굴레에서 걸어 나온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신앙은 악을 선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상처를 상처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상처의 기억이 내 안에서 심판의 권리로 변할 때, 그때 원한의 선이 생깁니다. 내가 겪은 억울함이 나는 끝까지 미워해도 된다는 허가증이 될 때, 원한의 선이 생깁니다.
원한의 선을 허문다는 것이 가해자의 잘못을 없던 일로 만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학대를 참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또다시 그 사람이 나를 해치도록 허락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은 결코 피해자에게 다시 상처의 자리로 돌아가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보여 줍니다.
또한 용서와 화해는 다릅니다. 용서는 내 마음의 심판대를 하나님께 넘기는 일입니다. 그러나 화해는 관계의 회복이며, 거기에는 회개와 책임, 변화와 안전이 필요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용서하면서도 거리를 두어야 하고,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하며, 예전 관계로 돌아가지 않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요셉은 원한의 선을 넘어선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용서의 완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열린 예표입니다. 요셉이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라고 말하며 심판자의 자리에서 내려왔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못 박는 사람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며 원한의 선을 완전히 허무셨습니다.
예수님은 상처가 없으셨기 때문에 용서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셨기 때문에 용서하신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보여 주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복수의 길을 열지 않으시고, 은혜의 길을 여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정죄했습니다. 조롱했습니다. 침 뱉었습니다. 채찍질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고통 한복판에서 원한의 족보를 끊으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원한의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의 길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원한의 선이 무엇인지를 보았습니다. 원한의 선은 단순히 미워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상처 입은 내가 어느 순간 심판자의 자리에 앉아, 누군가를 과거에 가두고 나 자신도 그 과거의 감옥에 머물게 만드는 선입니다.
특히 우리가 살아가는 이민 사회에서 이 원한의 선을 마주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민 사회는 좁고 우리 교회도 작습니다. 식탁에서 마주치고, 예배 후 악수하고, 같은 봉사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겉으로는 웃지만, 오래된 상처의 기억 때문에 마음속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는 조용히 이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내가 아직 마음속 법정에 세워 두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사람의 이름만 떠올라도 내 마음이 굳어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는 그 사람을 벌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혹시 그 사람 때문에 오늘의 기쁨을 잃어버리고 살지는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라는 요셉의 고백이 원한의 선을 허무는 첫걸음입니다.
이것은 상처를 쉽게 잊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 상처를 주님께 숨기지 말고 펼쳐 놓으라는 것입니다. 내 억울함을 주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앉았던 심판대에서 이제는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내가 세운 원한의 법정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고, 내가 그은 원한의 선보다 주님의 십자가가 더 넓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의 신앙의 여정이 원한의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