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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허무시는 예수님19-일곱 번과 일흔 번 사이

일곱 번과 일흔 번 사이

창세기 4:23-24, 마태복음 18:21-22

 

창4: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마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마1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오늘은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 시리즈 19번째 시간으로 “일곱 번과 일흔 번 사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도 전하는 말씀 가운데 여러분 각자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과 깨달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설교에서 우리는 창세기 50장의 요셉 이야기를 통해 우리 내면 깊은 곳에 감춰진 원한의 선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원한의 선은 처음에는 나를 지키는 선처럼 보입니다. 상처 입은 마음이 다시 다치지 않기 위해 세운 울타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원한의 선은 나를 심판자의 자리에 앉히고 상대방뿐만 아니라 내 영혼도 과거의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원한의 선을 허무는 것은 단순히 더 넓은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억울하고 상처받은 자신의 감정을 억지로 눌러 감추거나 없애는 것도 아닙니다. 원한의 선을 허무는 첫걸음은 요셉이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라고 고백한 것처럼, 심판자의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님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지난 설교에서는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뿌리내린 원한이 우리를 어디에 앉히는지를 살펴보았다면, 오늘은 원한의 선이 우리 손에 무엇을 쥐여 주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원한은 우리 손에 계산기를 쥐여 줍니다. 우리는 상처받으면 몇 번 무시당했는지, 몇 번 배신당했는지를 세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숫자가 쌓일수록, 우리는 그 숫자를 상대방을 심판해도 된다는 권리로 바꾸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원한의 선을 허물고 있습니까? 아니면 더 굳게 세우고 있습니까?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세고 있는가? 사랑받은 순간보다 상처받은 순간만 세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상처를 기억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상처의 숫자로 심판의 권리를 쌓고 있는가?


성경은 베드로의 질문을 통해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감춰둔 원한의 계산기를 꺼내서 보여 줍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우리는 베드로의 질문을 들으면 놀라게 됩니다. 용서는 한두 번도 쉽지 않은데, 일곱 번이라니, 너무 관대한 것 아닙니까? 일곱 번이나 용서하는 것이 정말 가능하겠습니까?


실제로 베드로의 질문은 당시 기준으로도 상당히 파격적인 제안이었습니다. 유대 전승에서는 세 번까지 용서하는 것을 충분히 관대한 태도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세 번을 넘어서 일곱 번을 말합니다. 일곱은 성경에서 완전함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관대한 수준의 용서를 제안한 것입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며 예수님의 칭찬을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신 베드로의 제안에는 중대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는 관대한 용서를 말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가 붙잡고 있는 것은 용서의 한계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세 번에서 일곱 번으로 숫자가 늘어났지만, 베드로의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원한의 계산기였습니다. 일곱 번을 세는 사람은 여덟 번째를 기다리게 됩니다. 일곱 번을 세는 순간, 여덟 번째부터는 더 이상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는 한계선이 생깁니다.


베드로의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익숙합니다. 주님, 언제까지 참아야 합니까? 몇 번부터는 더 이상 용서하지 않아도 됩니까? 몇 번째부터는 제 원한이 정당해집니까? 우리는 상처를 받으면 마음속에 계산기를 꺼냅니다. 몇 번 참았는지, 얼마나 당했는지,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를 기록합니다. 처음에는 아픔을 기억하고 견디기 위해 세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숫자는 내 억울함을 증명하는 증거가 되고, 마침내 상대방을 심판해도 된다는 권리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말합니다. 나는 할 만큼 했다. 이제 내 원한은 이유가 있다. 이제 저 사람을 더는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 이것이 원한의 계산법입니다. 원한은 단순히 미워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원한은 상처를 숫자로 바꿉니다. 그 숫자를 권리로 바꿉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권리를 심판으로 바꿉니다. 그렇게 원한의 계산이 쌓이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하나님을 대신해 심판대 위에 앉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질문에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18장 2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계산하면 몇 번이 됩니까? 490번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490번까지만 용서하면 된다는 뜻입니까?


만일 예수님의 말씀이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뜻이라면, 아마 우리는 마음속에 더 정교한 장부를 만들 것입니다. 이번이 327번째다. 아직 163번 남았다. 조금만 더 참자. 이제 거의 다 찼다. 그러다가 491번째 되는 날, 이제는 490번을 넘었다. 이제부터는 내 차례다. 이렇게 생각하며, 마치 자신의 복수가 정당한 권리라도 된 것처럼 상대방을 심판하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용서의 숫자를 늘리신 것이 아닙니다. 원한의 계산기 자체를 부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용서의 한계선을 세 번에서 일곱 번으로 옮기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한계선을 더 멀리 옮기신 것이 아니라, 상처를 세고 죄를 기록하여 마침내 심판할 권리를 확보하려는 인간의 계산법 자체를 허무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하필 이런 숫자로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성경의 오래된 이야기 하나를 떠올리게 합니다. 바로 창세기 4장에 나오는 라멕의 이야기입니다. 라멕은 아내들에게 자신이 행한 폭력과 보복을 과시하며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창세기 4장 24절입니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우리말 성경은 마태복음 18장 22절을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고 번역하고, 창세기 4장 24절은 칠십칠 배라고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NIV 성경이나 헬라어 성경은 마태복음 18장 22절과 창세기 4장 24절을 모두 칠십칠 배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라멕의 칠십칠 배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합니다.


물론 라멕이 말한 칠십칠 배는 용서의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건드리는 사람에게 얼마나 크게 보복할 것인지를 과시하고 위협하는 숫자였습니다. 라멕은 상처를 입은 만큼만 갚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건드리면 칠십칠 배로 갚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가인에게 주어진 일곱 배와 라멕이 선언한 칠십칠 배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해치는 자에게 일곱 배의 벌을 경고하신 것은 가인의 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가인의 죄를 이유로 또 다른 사람이 마음대로 복수하지 못하도록 막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을 위한 일곱 배라는 말씀은 폭력의 악순환을 멈추기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울타리였습니다.


그러나 라멕은 그 하나님의 보호 선언을 복수의 권리로 바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적인 보복을 막기 위해 가인에게 주신 보호의 말씀을, 라멕은 자기 보복을 과시하는 선언으로 뒤틀어 버린 것입니다. 그는 복수의 계산기를 들고 살았습니다. 그는 상처를 기억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상처의 기억을 보복할 권리로 바꾸었습니다.


원한이 쌓이면 나는 상처를 받아 아프다는 고백이 어느새 나도 갚아 줄 권리가 있다는 주장으로 변합니다. 나는 당했다는 경험이 마침내 나는 저 사람을 심판해도 된다는 판결이 되고, 복수까지 정당화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처럼 상처를 권리로, 권리를 복수로 바꾸는 원한의 계산 속에서 흘러왔습니다.


한 번 당하면 두 번 갚아 주고, 두 번 당하면 네 번으로 갚으려는 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래서 상처는 대물림되고, 분노는 증폭되고, 가정과 공동체는 복수의 계산 속에서 무너집니다. 부모가 풀지 못한 원한은 자녀에게 전해지고, 한 세대가 끝내 화해하지 못한 상처는 다음 세대의 거리감과 적대감으로 이어집니다.


라멕은 원한과 복수를 계속 곱해 갔습니다. 네가 나를 건드렸으니 나는 더 크게 갚겠다. 이것이 라멕의 세계였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이것은 우리 마음에도 그다지 낯설지 않은 세계입니다. 나를 한 번 무시한 사람에게 나는 두 배로 차가워지고 싶습니다. 나를 한 번 아프게 한 사람에게 나는 더 큰 침묵으로 갚고 싶습니다. 나를 한 번 부끄럽게 만든 사람을 언젠가 더 크게 부끄럽게 만들고 싶습니다.


하지만 라멕이 복수의 숫자를 끝없이 확대했다면, 예수님은 보복의 숫자를 용서의 언어로 뒤집으십니다. 라멕이 일흔일곱 배의 복수를 말한다면, 예수님은 일흔일곱 번의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라멕이 원한의 곱셈을 앞세운다면, 예수님은 은혜의 무한성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윤리 명령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간 역사 안에 깊이 뿌리내린 원한과 보복의 본능을 십자가의 은혜로 뒤집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정직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머리로는 원한의 계산기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용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묻습니다. 주님, 그래도 그 사람은 안 됩니다. 주님, 그 일이 얼마나 아팠는지 아십니까? 주님, 제가 그 사람 때문에 얼마나 무너졌는지 아십니까? 주님, 저는 그 사람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얼어붙습니다.


이처럼 원한의 선은 머리나 이성으로 아는 것만으로는 허물어지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합니다. 예배도 드립니다. 찬송도 부릅니다. 봉사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 한쪽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 둔 방이 있습니다. 그 방 안에는 오래된 표지판이 걸려 있습니다. 여기는 아무도 건드리지 말 것. 하나님도 이 문제만큼은 건드리지 마실 것. 이 원한만큼은 내가 붙들고 있을 것.


물론 예수님은 우리의 상처나 배신의 아픔을 절대로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쉽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네가 믿음이 있으면 아프지 말거나, 힘들어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지도 않으십니다. 대신에 예수님은 우리가 들고 있는 마음의 계산기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너는 지금 무엇을 세고 있느냐? 그 숫자가 정말 너를 살리고 있느냐? 네가 세어 온 그 상처의 숫자가 정말 너를 자유롭게 하고 있느냐? 물으십니다.


원한의 계산기는 처음에는 나를 지키고 보호하는 도구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계산기는 내 영혼을 묶는 쇠사슬이 됩니다. 내가 그 상처나 아픔을 잊지 않겠다고 붙든 숫자가, 어느새 나를 그 사람에게 묶어 둡니다. 그 사람은 한번 말했지만, 나는 그 말을 백 번 다시 듣습니다. 그 사람은 한 번 상처 주었는데, 나는 그 상처를 수백 번 다시 살아냅니다. 이것이 원한의 계산기가 가진 비극입니다.


원한의 계산기는 누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기록할 수는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를 증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계산기는 상처를 치유하지 못합니다. 상대방의 죄를 정확히 세어 낼 수는 있지만, 내 영혼을 과거에서 꺼내 주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내가 계산을 계속할수록, 그 사람의 잘못은 내 삶의 중심에 더 단단히 자리 잡습니다.


원한의 장부가 아무리 정확해도 그 장부에는 회복의 길이 없습니다. 상처의 숫자는 내 억울함을 증명할 수는 있지만,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는 가르쳐 주지 못합니다. 계산기는 누가 내게 빚졌는지는 알려 주지만, 내가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는 알려 주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상처를 잊거나 가해자의 잘못을 없던 일로 만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 상처의 최종 결산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상처를 정직하게 인정하되, 그 상처를 근거로 상대방을 끝까지 계산하고 판결하려는 자리에서는 내려오는 것입니다.


원한의 계산기를 내려놓는 것은 정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의와 심판의 최종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상처와 아픔을 기억하지만, 그 기억이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하거나 나를 복수의 사람으로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최종 결산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이유는 십자가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가볍게 여기신 자리가 아니라, 인간의 죄와 폭력의 무게를 예수님께서 친히 짊어지신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를 외면하지 않으시면서도,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낳는 길을 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붙잡고 있는 원한의 계산기를 내려놓게 하는 힘은 우리의 의지나 결심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지난 설교에서 우리는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라는 요셉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는 베드로의 질문을 들었습니다. 요셉은 심판자의 자리에서 내려왔지만, 베드로의 손에는 아직 계산기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 사이에 우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누군가의 잘못을 세고 있습니다. 몇 번 참았는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그 사람이 무엇을 얼마나 갚아야 하는지를 계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원한의 계산기를 내려놓고, 최종 결산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초대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아래 내려놓아야 할 것은 상처의 기억이 아닙니다. 상처를 지우지 않아도 됩니다. 아프지 않은 척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그 상처가 우리 손에 계산기를 쥐여 주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마음에 떠오르는 한 사람,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한 사건이 있다면, 그 이름과 그 일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내려놓으십시오. 주님, 이 상처는 실제입니다. 아직도 아프고 억울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최종 심판자는 제가 아닙니다. 제가 붙잡고 있던 계산기를 주님께 내려놓습니다. 용서는 상처가 사라진 뒤에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를 품은 채로도 심판자의 자리에서 내려오기 시작할 때 시작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일곱 번째를 세고 여덟 번째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계산기를 내려놓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계산보다 주님의 십자가가 더 크고, 우리가 세어 온 원한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깊다는 것을 믿고 원한의 계산기를 부수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신앙의 여정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