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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허무시는 예수님22-맨 끝자리가 하나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맨 끝자리가 하나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누가복음 14:7-11

 

눅14: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눅14: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눅14:9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눅14: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눅14: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오늘은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 시리즈 22번째 시간으로 “맨 끝자리가 하나님 나라의 시작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도 나누는 말씀을 통해 사람의 가치와 자격을 판단하고, 그에 따라 사람을 나누고 차별하는 선을 발견하며, 그 선을 넘어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주 우리는 예수님께서 갚을 수 없는 사람을 초대하라고 하신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세상은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보답할 수 있는 사람을 가까이하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기꺼이 자리를 내어 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갚을 수 없는 사람을 초대했다고 해서, 사람의 가치와 자격을 판단하여 서로를 나누는 선이 허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같은 공간, 같은 식탁, 같은 공동체에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선을 긋습니다.


그것은 어떤 선입니까? 누가 상석에 앉고 누가 끝자리에 앉아야 하는지를 나누는 서열의 선입니다. 지난주 가치와 자격의 선이 초대 명단에서 작동했다면, 오늘은 식탁의 자리 배치에서 다시 작동합니다. 상석은 가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자리처럼 여겨지고, 끝자리는 그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 머무는 자리처럼 취급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중심에 서고 싶어 하고,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일까요? 높은 자리를 향한 욕망의 깊은 곳에는 남보다 높아지려는 마음뿐 아니라, 인정받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도 숨어 있습니다. 알랭 드 보통은 자신의 책 “불안”에서 현대인의 이러한 심리를 지위 불안으로 설명합니다. 그 안에는 사람들에게 잊히거나 무가치한 존재로 밀려날지 모른다는 깊은 불안이 숨어 있습니다.


특별히 이민자의 삶에는 이런 지위 불안이 더 깊이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쌓아 온 학력과 경력, 직책과 인간관계가 낯선 땅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영어와 제도에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작아지고, 다시 처음부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사람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안정된 직업과 집, 자녀의 성공과 교회 직분을 통해 잃어버린 자리를 되찾으려 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예수님께서 초대받은 사람들이 식탁에 들어오면서 저마다 상석을 찾는 모습을 지켜보셨다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누가복음 14장 7절입니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사람들은 식탁에 들어오자마자 좋은 자리를 찾았습니다. 주인과 가까운 자리,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자리, 자신의 신분과 명예를 드러낼 수 있는 자리를 골랐습니다.


저마다 가장 주목받는 자리를 택하려는 사람들을 보신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4장 8절입니다.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이 말씀은 단순히 좋은 자리를 먼저 차지했다가 밀려나는 수치를 피하라는 영리한 처세술을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작동하는 높임의 욕망을 보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 자리를 찾습니다. 회의에 참석하면 누가 앞자리에 앉는지를 봅니다. 행사에 가면 누가 귀빈석에 앉는지를 봅니다. 사진을 찍으면 누가 가운데에 서는지를 봅니다. 자리에는 공간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상석은 단순히 좋은 자리가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가치 있고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사회적 증명서처럼 여겨졌습니다.


오늘날에는 사회나 직장에서의 높은 직책이 상석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박수와 칭찬도 상석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직분이 상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높임의 욕망에는 끝이 없습니다. 조금 인정받으면 더 큰 인정을 원합니다. 누군가 나보다 더 주목받으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그래서 타인의 성공은 축하할 일이 아니라 내 자리를 위협하는 일이 됩니다.


우리가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 할 때, 옆 사람은 경쟁자가 됩니다. 그 순간 식탁은 공동체가 아니라 순위표가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4장 10절입니다.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이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일부러 끝자리에 앉아서 주인이 자신을 높은 자리로 불러주기를 기다리라는 계산된 겸손이 아닙니다.


나는 겸손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얻기 위해 낮은 자리를 선택한다면, 겸손마저도 인정받기 위한 전략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앞에 나서지 않으면서도 마음속으로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내가 얼마나 겸손한지 알아주겠지. 그러면 그 사람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끝자리는 새로운 상석이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이미 사회와 교회에서 끝자리로 밀려난 사람들에게 계속 그 자리에 머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목소리를 빼앗긴 사람에게 더 침묵하라고 하시는 것도 아니며,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에게 무조건 참고 견디라고 하시는 말씀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상석을 독점하고 다른 사람을 주변으로 밀어낸 사람들에게 주어진 경고입니다. 겸손은 약한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지우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힘과 권한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특권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신 것은 자리가 나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야 내가 귀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 내 존재가 증명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사랑받는 사람입니다. 나의 가치는 내가 차지한 자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에서 옵니다.


세계적인 영성가 헨리 나우웬의 삶은 이를 잘 보여 줍니다. 하버드 대학교 교수로 학문적 명성과 인정을 누리던 그는 발달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는 데이브레이크 공동체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는 그의 학력과 명성이 관계의 중심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장애가 있는 이웃들을 돌보는 동시에 그들과 함게 살아가며, 성취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 사랑받는 법을 배웠습니다. 세상이 부러워하는 높은 지위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삶을 내려놓자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셨습니까? 상석만 바라보는 사람은 누가 자신을 인정하는지에 마음을 빼앗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기꺼이 끝자리로 내려갈 때, 그동안 보이지 않던 사람을 바라볼 여유가 생깁니다. 상석에서는 누가 나를 인정하는지가 보입니다. 끝자리에서는 누가 혼자 앉아 있는지,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구인지가 보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끝자리의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이 삭개오를 죄인이라 부를 때 예수님은 나무 위에 숨어 있던 그를 보셨습니다. 사람들이 아이들을 귀찮게 여길 때 예수님은 그들을 품에 안으셨습니다. 성전에서 부자들이 많은 헌금을 드릴 때 예수님은 두 렙돈을 드린 가난한 과부를 보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남들이 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볼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께서 가장 높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빌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십자가는 세상이 수치와 실패와 저주의 자리로 낙인찍은 곳이었습니다. 제국이 죄인이라고 판정한 사람들을 공동체 밖으로 밀어내던 자리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맨 끝자리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끝자리에 앉아 있던 우리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죄와 실패와 수치 때문에 끝자리로 밀려나 있을 때, 예수님은 높은 곳에서 우리에게 올라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직접 우리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에서 주인은 끝자리에 앉은 사람을 ‘벗이여’라고 부릅니다. 누가복음 14장 10절 후반부입니다.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이것이 세상의 가치와 자격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의 방식입니다.


이 비유의 장면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빛에서 바라보면, 우리는 그 안에서 세상의 가치와 자격을 뒤집는 복음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높은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의 벗이 된 것이 아닙니다. 인정받을 만한 공로를 쌓아서 하나님의 식탁에 오른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끝자리까지 내려오셔서 우리를 벗이라 부르시고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낮아짐은 자신을 비하하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을 끊임없이 낮추고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존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왜곡된 겸손이 될 수 있습니다. 참된 겸손은 하나님께서 주신 나의 가치를 받아들이면서도, 그 가치를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기 위해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소중합니다. 그러나 나만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나의 은사는 귀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은사도 귀합니다. 나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들어야 합니다. 겸손은 나를 작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내 옆 사람도 나만큼 크게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겸손은 개인의 마음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교회의 관계와 질서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교회는 높은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어떤 직분도 상석의 증명서가 아닙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은 더 낮은 자리에서 더 많은 사람을 섬기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특별히 이민 교회에서 자리를 내어 준다는 것은, 장시간 노동으로 봉사하지 못하는 사람을 믿음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지 않고, 체류 신분과 경제적 어려움, 자녀와 부모 돌봄으로 지친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럴 때 교회는 성공한 사람들만 상석에 앉는 곳이 아니라, 낯선 땅에서 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존엄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식탁이 됩니다.


공동체는 누군가가 자리를 내어 줄 때 새로워집니다. 기성세대가 끝까지 중심을 차지하면 다음 세대는 문밖에 서게 됩니다. 오래된 교인이 모든 결정을 독점하면 새로 온 사람은 손님으로만 남습니다. 목회자가 모든 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성도들의 은사는 잠들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리를 빼앗는 사람을 통해 확장되지 않습니다. 기꺼이 자리를 내어 주는 사람을 통해 자랍니다.


예수님은 비유의 결론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4장 11절입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위아래로 뒤집어 놓으신다는 단순한 역전의 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높음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선언입니다.


세상에서 높은 사람은 다른 사람 위에 서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높은 사람은 다른 사람 아래에서 받쳐 줍니다. 세상은 섬김받는 사람을 크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섬기는 사람이 큰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장 낮은 자리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를 구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만드셨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지난주 우리는 누구를 식탁에 초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식탁에서 내가 어느 자리를 원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알아보는 자리를 원합니까? 내 의견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자리를 원합니까? 내 수고가 인정받는 자리를 원합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끝자리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 자리는 패배의 자리가 아닙니다. 아무도 보지 못했던 사람을 볼 수 있는 자리입니다. 누군가에게 자리를 내어 줄 수 있는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만나 주시는 자리입니다.


이민 교회는 낯선 땅에서 삶의 자리와 이름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서열을 교회 안에서 다시 만들 것이 아니라, 누구도 이름 없는 사람으로 남지 않도록 서로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바라기는 맨 끝자리가 하나님 나라의 시작임을 믿고, 낮은 자리에서 이웃을 바라보고 섬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