갚을 수 없는 사람을 초대하라
누가복음 14:12-14
눅14:12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눅14:13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눅14:14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오늘은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 시리즈 21번째 시간으로 “갚을 수 없는 사람을 초대하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도 말씀 가운데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그어진 선을 발견하시고, 그 선을 넘어 하나님 나라의 넓은 품으로 나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난 세 번의 설교를 통해 우리 안에 깊이 감추어진 원한의 선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요셉의 고백을 통해 심판자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함을, 베드로의 질문을 통해 원한의 계산기를 내려놓아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의 비유를 통해 상처의 기억보다 은혜의 기억을 더 깊이 새겨야 한다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물론 세 번의 설교만으로 우리 내면에 오랫동안 깊게 뿌리내린 원한의 선을 허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래된 상처는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억울함의 기억은 마음 깊은 곳에 오래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원한을 마음에 품고 계산하며 살아왔는지는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원한의 계산기를 내려놓고 싶지만, 어느새 그것을 다시 손에 쥐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 손으로는 또 다른 계산기를 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쓸모와 보답의 계산기입니다. 더 깊이 말하면, 사람의 가치와 자격을 따지는 계산기입니다. 원한의 계산기는 “저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했는가?”를 묻고, 과거의 상처를 계산합니다. 그러나 쓸모와 보답의 계산기는 “저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를 묻고, 미래의 이익을 계산합니다.
이처럼 오늘부터 살펴보려는 우리 내면에 깊게 그어진 선은 바로 “가치와 자격의 선”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만나면 알게 모르게 그 사람의 가치를 평가합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지, 나와 우리 공동체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살펴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우리 관계와 공동체 안에 들어올 자격이 있는지도 판단합니다. 저 사람은 우리와 잘 어울리는가? 우리 교회 분위기에 맞는가? 책임감이 있는가?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에게 부담을 주지는 않는가? 이런 식으로 우리는 사람의 가치를 매기고, 자격을 판단합니다.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자리를 내어 주고, 자격이 있다고 인정한 사람은 안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사람, 자격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사람은 조용히 바깥으로 밀어냅니다. 물론 노골적으로 사람을 내쫓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과 식탁에는, 우리 기준으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사람을 위한 자리가 쉽게 마련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 말씀은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초대받아 식사하는 자리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4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식탁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당시의 식탁은 단순히 음식을 먹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식탁은 사람의 명예와 지위를 보여 주는 사회적 지도였습니다. 누가 초대받았는지, 누구 곁에 앉았는지, 어느 자리에 앉았는지가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를 보여 주었습니다.
부유한 사람을 초대하면 그 사람도 나를 초대했습니다. 유력한 사람을 대접하면 그 사람의 명예와 영향력이 나에게도 돌아왔습니다. 자신보다 높은 사람을 식탁에 초대하는 것은 관계가 아니라 투자였고, 친교가 아니라 교환이었습니다. 그 식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계산서가 놓여 있었습니다. 내가 당신을 대접했으니, 당신도 나를 대접하십시오. 식사는 끝나도 계산서는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구나 친척을 초대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보답할 수 있는 사람만 초대하는 것입니다. 내가 베푼 것이 언젠가 나에게 다시 돌아올 만한 사람만 가까이할 때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의 가치와 자격을 매기게 되면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부담스러운 사람이 됩니다. 갚을 수 있는 사람은 환영받고, 갚을 수 없는 사람은 식탁 밖으로 밀려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복음 14장 13절입니다.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예수님은 식탁의 초대 명단을 완전히 뒤집으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가난한 사람과 장애가 있는 사람은 단지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몸이 불편한 사람으로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이 그들을 마치 하나님의 복에서 멀어진 사람, 죄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처럼 여겼습니다. 또한 공동체 안에서 도움을 주기보다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존재 앞에는 끊임없이 질문표가 붙었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 됩니까? 당신은 이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 질문 자체를 뒤집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식탁에서 사람의 가치는 돈이 많기 때문도 아니고, 건강하기 때문도 아니며, 사회적 지위가 높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로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이기에 존귀합니다. 무엇을 생산하지 못해도 소중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지 못해도 소중합니다. 평생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야 한다고 해도 그 사람의 가치는 줄어들지 않습니다. 사람의 존재 가치는 그 사람이 하는 일보다 먼저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동차는 오래되거나 고장이 나서 사용할 수 없으면 폐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물건이 아닙니다. 사람을 생산성과 효율성으로 평가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을 하나의 도구로 바꾸어 버립니다. 사람은 쓸모가 있어서 가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존재 자체로 존귀합니다. 사랑받을 만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이미 새겨 놓으신 가치를 발견하고 존중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세상에 분명하게 보여 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과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단지 음식을 나누어 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집으로 초대하여 같은 식탁에 앉으라는 것입니다. 정식 손님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도움을 주는 것과 함께 식탁에 앉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함께 식탁에 앉으면 얼굴을 마주 보아야 합니다. 같은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낯섦과 필요, 그리고 우리가 감수해야 할 불편함까지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선은 멀리서도 할 수 있지만, 환대는 가까이 앉아야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도와주면서도 여전히 그 사람과 선을 그을 수 있습니다. 나는 주는 사람이고 저 사람은 받는 사람입니다. 나는 온전한 사람이고 저 사람은 부족한 사람입니다. 나는 식탁의 주인이고 저 사람은 감사해야 하는 손님입니다. 이런 관계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선이 깊게 그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식탁에서는 그 선도 무너집니다.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 도움을 주는 사람과 도움을 받는 사람이 하나님의 초대로 같은 식탁에 앉습니다. 그 식탁에서는 아무도 다른 사람의 가치를 심사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누가 앉을 자격이 있는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식탁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교회를 우리의 식탁처럼 생각합니다. 내가 오래 다닌 교회이기 때문에 누가 들어올 수 있는지 판단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 문화에 맞는 사람인지, 충분히 헌신할 사람인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사람인지 먼저 살펴봅니다. 그러나 교회는 우리의 식탁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식탁입니다. 우리는 식탁의 주인이 아니라 먼저 초대받은 손님입니다.
물론 교회에는 책임과 질서가 필요합니다. 포용은 해로운 행동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며, 사랑은 모든 행동을 무조건 허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에게나 중요한 역할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역할을 맡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과 그 사람이 식탁에 앉을 자격이 없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직분의 자리는 분별할 수 있지만, 존재의 자리는 박탈할 수 없습니다.
책임을 묻더라도 그 사람의 존엄까지 지워서는 안 됩니다. 공동체를 해치는 잘못된 행동에는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말해야 할 때가 있지만, 그 사람의 존재를 향해서는 여전히“당신도 하나님의 형상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모든 행동을 허용하는 곳이 아니지만 어떤 사람도 가치 없는 존재로 취급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도 교회를 선택할 때, 또 교회가 사람을 대할 때, 서로의 이익과 쓸모를 계산할 때가 많습니다. 교인들은 자기가 원하는 이익이나 필요를 얻을 수 있는 교회를 선호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어떤 교인이 교회에 유익하고 쓸모가 있는가로 교인을 평가합니다. 결국 서로의 쓸모를 채워주지 못하는 사람, 즉 몸이 아파 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 나이가 들어 봉사하기 어려운 사람, 경제적으로 어려워 헌금하기 힘든 사람은 가장자리로 밀려납니다.
우리는 그들을 내쫓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름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의견을 묻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그들이 없어도 교회 운영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들이 있으면 돌봄의 수고만 늘어난다고 여길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과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에는 쓸모없는 지체가 하나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몸의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2절입니다.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약한 지체는 강한 지체의 사랑과 자비를 보여 주기 위해 존재하는 소품이 아닙니다. 그들 역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온전하고 소중한 지체입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과 장애가 있는 사람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들도 우리에게 자신의 이야기와 지혜와 웃음을 나눕니다. 우리가 보지 못했던 세상을 보게 하고, 우리가 강함과 성공과 효율을 얼마나 우상처럼 섬겨 왔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그들에게 줄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정하는 방식의 보답이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사회가 가치 있다고 여겼던 돈과 명예와 영향력으로 갚을 수 없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사람의 가치를 측정하던 기준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몸소 베푸신 식탁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까지 우리가 성찬을 통해 기념하는 주님의 식탁입니다. 최초의 성찬의 식탁에 앉아 있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 가운데 누가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을 자격이 있었습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격 있는 사람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될 사람, 자신을 지켜 줄 사람, 자신의 은혜에 합당하게 보답할 사람을 골라 초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배신하고 떠날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 주셨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할 사람도, 자신을 종교 지도자에게 팔아넘길 사람도 그 식탁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나의 몸이다.” 성찬의 식탁은 자격 있는 사람이 보상받는 식탁이 아닙니다. 자격을 내세울 수 없는 사람이 은혜로 초대받는 식탁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 식탁에 앉아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더 착하기 때문입니까? 우리의 믿음이 더 훌륭하기 때문입니까? 교회를 위해 많은 일을 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도 아무것도 갚을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먼저 초대하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은혜로 앉아 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이 식탁에 앉을 자격을 증명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전적인 은혜로 예수님의 식탁에 앉아 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이 자리에 앉을 만큼 쓸모가 있습니까?”라고 물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4장 14절입니다.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우리는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갚을 수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때 비로소 사랑이 거래가 아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때 비로소 대접이 투자가 아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때 비로소 사람의 가치를 보답 능력과 분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식탁이 하나님의 식탁을 닮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으리라는 약속은 더 큰 보상을 받기 위해 가난한 사람을 이용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즉시 돌려받으려 하지 말고, 그 사랑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기억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기억하십니다. 보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그 사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꼭 거창한 잔치를 여는 것만은 아닙니다. 교회에서 친교할 때 늘 혼자 있는 사람 옆자리를 찾아 함께 앉는 것입니다. 봉사할 수 없는 형편의 교우에게는 “당신이 우리 가운데 있어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 새로 온 사람, 말이 서툰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초대한다는 것은 단지 밥 한 끼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이야기가 들리게 하고 그 사람의 존엄을 지켜 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빈 의자 하나를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저 자리는 누구를 위한 자리냐?” 우리를 다시 초대할 사람입니까? 교회에 많은 도움을 줄 사람입니까? 우리와 생각이 비슷하고 편안한 사람입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갚을 수 없는 사람을 초대하라.”
그 빈 의자는 우리에게 보답할 사람만을 위해 놓인 자리가 아닙니다. 세상이 쓸모없다고 평가한 사람, 공동체의 가장자리로 밀려난 사람, 자신은 앉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위한 자리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 빈 의자는 바로 우리를 위해 준비되었던 자리입니다. 우리도 그 의자에 앉을 자격을 증명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의자를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 주셨습니다. 생명의 빵을 떼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이 식탁의 사람이다.”
바라기는 우리 자유교회가 사람의 쓸모를 계산하는 교회가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기뻐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필요한 사람만 환영하는 교회가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도 중심의 자리를 내어 주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갚을 수 없는 사람을 초대하고, 그들과 함께 먹으며, 인간이 그어 놓은 쓸모와 보답, 가치와 자격의 선을 허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