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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허무시는 예수님24-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마가복음 10:46-52

 

막10: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막10: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막10: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막10: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막10: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막10: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막10: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 시리즈 24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부터 마지막 세 편의 말씀을 통해, 선이 허물어진 자리에 우리가 어떤 교회를 세워야 하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도 함께 나누는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그어진 선을 발견하고, 그 선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미움과 무시, 정죄와 서열의 이름으로 사람을 밀어내는 수많은 선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선은 언제나 차가운 얼굴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내가 저 사람을 더 잘 안다”라는 선의의 얼굴로 나타납니다.


지난 설교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식탁에는 아직도 자리가 남아 있다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자리를 내어 주는 것만으로 모든 선이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자리는 내어 주면서도 그 사람의 목소리는 빼앗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병원에 가면 의사가 환자보다 가족에게만 질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영어가 익숙하지 않거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정작 환자는 눈앞에 있는데도 다른 사람에게 묻습니다. “어디가 아프시대요?” “무엇을 원하신대요?” 가족은 사랑으로 대신 대답하지만, 그 순간 환자는 자신에 관한 대화에서조차 빠져버릴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면 무엇이 필요한지 묻기 전에 먼저 결정합니다. 저분에게는 음식이 필요할 거야. 저 청년에게는 이런 프로그램이 필요할 거야.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는 우리가 대신해 주는 것이 가장 좋을 거야.


물론 이러한 판단에는 선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선한 마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선의는 때때로 부드러운 얼굴을 한 지배가 됩니다. 돕는 사람은 계속 결정하고, 도움을 받는 사람은 계속 결정당하기만 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할 선은 친절과 도움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선택권과 목소리까지 대신 차지하는 선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여리고를 지나실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가고 계셨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 함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행렬 밖, 길가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디매오였습니다. 막 10:46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이 짧은 구절은 바디매오가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자리에 놓여 있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길을 걷고 있었고 그는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목적지를 향해 움직였지만, 그는 길가에 머물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도움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길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과 길가에 머물러 있는 바디매오 사이에는 이미 눈에 보이지 않는 거리와 경계가 생겨 있었습니다. 그 길을 오가던 많은 사람에게 바디매오는 자신의 이야기와 목소리를 가진 한 사람이라기보다, 도움을 받아야 하는 ‘맹인 거지’로 먼저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자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막 10: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당시 유대 문화에서 “다윗의 자손”은 메시아적 의미를 가진 호칭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걷던 제자들조차 그분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메시아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가에 앉아 있던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며 그분께 긍휼을 구했습니다.


바디매오가 소리를 지르자 많은 사람이 그에게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습니다.(막 10:48) 사람들에게 그의 외침은 한 사람의 절박한 기도가 아니라 행렬을 방해하는 소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 걷고 있었지만, 정작 예수님을 가장 절실히 부르는 목소리는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바디매오를 도움을 받는 사람으로는 보았지만, 목소리를 가진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눈에 도움을 받는 사람은 자기 목소리를 내기보다 조용히 도움을 받는 사람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절박한 외침을 들으시고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십자가를 향해 가는 길이었고 많은 사람이 그분을 따라 걷고 있었지만, 길가에서 들려오는 한 사람의 목소리가 그 행렬을 멈추게 했습니다.


우리는 빨리 움직이고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을 능력과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도 예배와 행사와 프로그램이 차질 없이 진행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시는 길을 멈추어서라도 한 사람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속도는 가장 앞서가는 사람의 속도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속도는 가장 뒤에 남은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속도입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를 직접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그를 꾸짖던 사람들에게 “그를 부르라”라고 명하셨습니다. 조금 전까지 “조용히 하라”고 말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막 10:49b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예수님은 바디매오만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를 꾸짖으며 침묵시키던 군중의 언어도 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 곁에서 좋은 말씀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까지 “조용히 하라”고 막았던 사람에게 오늘 “안심하고 일어나십시오. 주님이 당신을 부르십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전해 들은 바디매오는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막 10:50) 당시 겉옷은 중요한 소유물이었으며, 특히 가난한 사람에게는 몸을 보호하는 매우 소중한 물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그 겉옷마저 내버리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의 눈을 고쳐 주실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원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연해 보이는 것을 당연하다고 결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막 10:51)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의 장애만 보고 그의 필요를 미리 결정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사자인 바디매오에게 직접 물으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님의 질문 앞에서 바디매오는 자기 삶에 대해 자기 입으로 말하는 사람으로 세워집니다.


사람들은 그의 장애와 처지를 먼저 보았지만, 예수님은 그를 대화의 상대자로 세우셨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가진 장애에 주목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한 사람을 보신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대답합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기 입으로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자 그가 보게 되었고, 길에서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막 10: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마가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은 바디매오에게 물으신 것과 거의 같은 질문을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이미 하셨습니다. 막 10:36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걷던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길가에 앉아 있던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곁의 자리를 요구했지만, 바디매오는 보게 된 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따랐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처음에 바디매오를 “길가에” 앉아 있는 사람으로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그가 “길에서” 예수님을 따랐다고 기록합니다. 사람들의 행렬 밖에서 도움을 기다리던 사람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하여 일어나, 예수님의 길을 걷는 제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놀라운 반전입니다. 공동체의 가장자리에서 도움만 받아야 할 사람처럼 보였던 바디매오가 참된 제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 곁에서 길을 걷던 제자들은 그 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길가에 앉아 있던 바디매오는 마침내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선 밖의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준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을 조금 나누어 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에게 예수님의 길을 가르쳐 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사람이고 저들은 배우는 사람이라는 선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제 아내가 가끔 제게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나에게 해 주려고 하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해 주세요. 그게 친절이고 사랑이에요.” 저는 좋은 것을 해 준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아내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묻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은 내가 주고 싶은 것을 주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묻고, 그 대답을 존중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환대는 “우리가 당신을 받아 주겠습니다”라는 말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행은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라는 말에서 시작합니다. 서로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듣고 무엇이 진정한 생명과 사랑의 길인지 함께 분별해 가는 것입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대신 결정하는 것은 동행이 아니라 지배입니다.


이번 한 주간 한 사람에게 예수님의 질문을 건네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 주면 좋겠습니까?” 그리고 그 사람이 대답할 때 변명하거나 설명하거나 해결책을 말하기 전에 끝까지 들어 봅시다.


교회도 물어야 합니다. 연로한 교우와 장애나 질병을 안고 살아가는 교우에게 우리가 어떻게 함께하면 좋을지, 교회 안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싶은지 물어야 합니다. 다음 세대와 교회를 떠났다가 돌아온 사람에게 어떤 교회를 꿈꾸는지 들어야 합니다. 처음 온 사람에게 무엇이 불편했는지 묻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먼저 묻고 들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소리에 먼저 귀 기울이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향해 가시던 예수님이 바디매오의 외침 때문에 멈추셨듯,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세상이 듣지 않던 사람들의 신음과 울음을 품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신다는 소식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람들은 바디매오에게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지만, 예수님은 가던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필요를 이미 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먼저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도움받아야 할 맹인으로 보았지만, 예수님은 그를 자신을 따르는 제자로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목소리 큰 사람들의 속도로 달리는 행렬이 아닙니다. 교회는 길가에서 들려오는 한 사람의 목소리 앞에 함께 멈출 수 있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자유교회가 빨리 가기보다 멈출 줄 알고, 대신 말하기보다 먼저 물을 줄 아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무엇을 해 드리면 좋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함께하면 좋겠습니까?” 예수님의 이 질문을 우리의 질문으로 삼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