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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허무시는 예수님26-십자가 아래서 태어난 가족

십자가 아래서 태어난 가족

마가복음 3:31-35, 요한복음 19:25-27

 

막3:31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막3:32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막3: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막3:34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막3: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요19: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요19: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요19: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오늘은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 시리즈 26번째이며 마지막 시간으로 “십자가 아래서 태어난 가족”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지난 8개월 동안 우리를 선 밖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따라 여기까지 함께 걸어오신 모든 교우에게 감사드립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 시리즈의 끝이 우리 교회의 새로운 시작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하려는 마지막 선은 혈연만이 가족이라는 선입니다. 사람들은 가족을 가장 따뜻한 울타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가족이 따뜻한 울타리인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에게 가족은 가장 깊은 사랑의 자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가장 오래되고 많은 상처가 남아 있는 자리입니다.

 

이민자에게 가족은 더욱 특별합니다. 낯선 땅에서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밤낮없이 일했고, 자녀는 부모의 통역자가 되어 병원과 은행과 관공서를 함께 다녔습니다. 가족은 이민 생활을 버티게 한 가장 든든한 힘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과 가족만 사랑하는 것은 다릅니다. 가족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소중한 사랑과 책임의 자리이지만, 그 사랑이 자기 가족의 울타리 안에만 갇히면 폐쇄적인 가족주의로 굳어질 수 있습니다. 내 가족의 성공과 안전만을 위해 다른 사람의 아픔을 외면하고, 가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진실을 감춘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이 아닙니다.

 

또한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것과 부부와 자녀로 이루어진 한 가지 모습만을 온전한 가족의 기준으로 삼는 것도 같은 일이 아닙니다. 혼자 살아가는 사람, 결혼하지 않은 사람, 자녀가 없는 부부, 이혼이나 사별을 겪은 사람, 가족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받지 못한 사람은 교회 안에서도 자신이 선 밖에 서 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가족을 소중히 여긴다는 말이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을 부족하거나 실패한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가정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가족 없이 홀로 남겨졌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새로운 가족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혈연가족을 무너뜨리는 일이 아니라, 가족의 품을 넓히는 일입니다. 혈연은 가족이 시작되는 소중한 자리이지만, 사랑과 책임이 머물 수 있는 유일한 울타리는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 가족의 문을 혈연 밖으로 더 넓게 열어 주십니다.

 

마가복음 3장을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막3:32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예수님의 가족은 밖에 서 있고, 예수님 주위에는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막3: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이것은 혈연가족을 버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믿음을 앞세워 육신의 부모를 돌보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까지 혈연가족에게만 머물던 사랑과 책임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새로운 형제자매에게까지 넓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가족은 사랑이 멈추는 울타리가 아니라, 사랑이 이웃에게 흘러가는 출발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단순히 “누구든지 내 가족이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가족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세우시는 새로운 가족은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인 친밀한 집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씀은 혈연과 신분을 넘어 누구에게나 가족의 문을 여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는 말씀은 그 가족이 걸어갈 방향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행한 사람만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자격 조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둘러앉은 여러 사람을 바라보며 그들을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이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갖춘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예수님 곁에 머물러 말씀을 듣고, 그분이 걸으시는 길을 배우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함께 배워야 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3장의 첫 장면에서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회당 한가운데 세우고 물으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옳으냐?” 그리고는 그 사람의 손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3장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의 방향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사람을 살리고, 상처 입은 사람을 회복시키며, 밀려난 사람을 다시 공동체 한가운데 세우는 일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족이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입장료는 아닙니다. 은혜로 믿음의 가족이 된 사람들이 함께 배워 가는 가족의 삶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족은 같은 피를 가진 사람들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함께 듣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서로의 삶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마가복음 3장은 누가 예수님의 가족인지를 선언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가족은 선언만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서로의 삶을 받아들이는 구체적인 순종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혈연을 넘어선 믿음의 가족은 어떻게 태어나는 것일까요? 요한복음 19장 25절 이하의 말씀은 그 답을 십자가 아래에서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십니다. 제자들은 대부분 도망쳤고, 십자가 아래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몇몇 여성, 그리고 사랑하시는 제자만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숨쉬기조차 어려운 극심한 고통 속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고통에만 갇히지 않으시고 십자가 아래에 서 있는 어머니와 제자를 바라보십니다. 요19:26a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에도 사람을 보셨습니다. 아들을 잃게 될 어머니와 곁에 남아 있는 제자를 바라보셨습니다. 새로운 가족은 바로 이 예수님의 시선과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어머니에게 말씀하십니다. 요19:26b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이어서 사랑하시는 제자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요19:27a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요한복음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기록합니다. 요 19:27b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님은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두 사람을 어머니와 아들로 세우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제자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 멈추지 않고 자기 집에 마리아의 자리를 마련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삶으로 행했습니다. 새로운 가족은 아름다운 호칭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집과 식탁, 시간과 일상을 서로 내어 주며 누구도 홀로 남겨 두지 않을 때 삶 속에서 태어납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은혜는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는 데서 멈추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까지 새롭게 합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용서하는 자리이면서, 지금까지 아무 관계가 없던 사람들이 어머니와 아들, 형제와 자매로 이어지는 새로운 가족이 탄생하는 사랑과 은혜의 자리입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를 믿음의 형제자매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히 친하게 지내자는 낭만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가족이 된다는 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모든 짐을 대신 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자신의 짐을 홀로 감당하지 않도록 서로 책임을 나누는 것입니다. 명절에 갈 곳 없는 사람을 식탁으로 초대하고, 부모와 멀리 떨어져 있는 청년에게 믿을 만한 어른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아래서 만드신 믿음의 가족은 특정한 한 사람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떠맡겨 유지되는 가족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자신을 내어 주셨기 때문에,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시 약한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위험에 처한 사람을 보호하고, 잘못한 사람에게 진실한 회개와 책임과 변화를 요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허무시는 것은 사람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선이지, 생명을 보호하는 경계가 아닙니다. 사랑은 사람을 차별하고 혐오하여 밖으로 밀어내는 선은 허물되, 폭력과 학대로부터 생명을 지키는 경계는 공동체가 함께 세우고 지켜 주는 일입니다.

 

혈연가족에게 모든 돌봄을 떠넘기는 사회는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가 아닙니다. 가족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한 가족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지우고 고립시키는 사회입니다. 아무리 서로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질병과 노화, 지속적인 돌봄과 경제적 위기가 가져오는 무게를 자기들만의 힘으로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람의 힘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아래의 마리아와 제자를 서로의 곁에 세우셨듯이, 교회는 먼저 무엇이 필요한지 묻고 그 가족의 선택과 사생활을 존중하면서 홀로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은 혈연가족을 대신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곁에 새로운 가족으로 서서 사랑과 책임의 품을 넓히는 일입니다.

 

우리 자유교회는 작은 교회입니다. 작은 교회이기에 많은 인력과 재정, 다양한 프로그램을 갖추지 못합니다. 그러나 작은 교회의 힘은 많은 일을 해내는 데 있지 않고, 한 사람을 놓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작은 교회는 프로그램보다 관계를, 익명성보다 이름을, 일회성 도움보다 오래 머무는 동행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군중 속에 가려지지 않고, 예배당의 빈 의자 하나가 금세 눈에 들어옵니다. 우리는 이름만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 뒤에 있는 얼굴과 이야기, 아픔과 기다림까지 기억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보이지 않으면 먼저 안부를 묻고, 한 끼의 음식과 한 번의 운전, 한 통의 전화로 곧바로 곁에 설 수 있습니다.

 

누구도 예배에 참석하는 숫자나 도움만 받는 사람으로 머물지 않고, 저마다의 목소리와 은사로 공동체의 삶을 함께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가 작다고 저절로 가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까움을 간섭으로 만들지 않고 서로의 사생활과 경계를 존중하면서도, 누구도 홀로 사라지지 않게 할 때 작은 교회의 친밀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 됩니다.

 

이러한 작은 교회의 친밀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안에서 혈연과 문화와 세대를 넘어서는 가족의 삶으로 자라나야 합니다. 십자가 아래서 마리아와 제자를 서로에게 맡기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외로운 사람을 일방적으로 돌보는 데 그치지 않고, 서로에게 아들과 딸, 어머니와 아버지, 자매와 형제가 되어 주는 공동체로 자라가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 잘 맞는 사람들이 모여 가족이 되는 곳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가족으로 주어진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내가 저 사람을 가족으로 선택할 것인가?”만 묻지 않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들려온 주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이어집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보라, 네 아들이라. 보라, 네 자매이며 네 형제라.”

 

이 새로운 가족은 성찬의 식탁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는 혈연으로 연결되지 않았지만 한 떡과 한 잔을 나누며 함께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세워집니다. 성찬은 십자가 아래서 태어난 하나님의 가족이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받아들이는 식탁입니다.

 

이제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 설교 시리즈는 오늘로 마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스물여섯 편의 설교를 통해 우리 안에 그어진 수많은 선을 살펴보았습니다.

 

냄새와 계급의 선, 민족과 인종의 선, 성별과 이념과 세대의 선, 의인과 죄인의 선, 축복과 저주의 선, 원한과 용서의 선, 쓸모와 자격과 자리의 선을 보았습니다. 그 말씀 앞에서 우리는 손에 든 돌멩이를 내려놓고, 심판자의 자리에서 내려오며, 원한의 계산기를 부수고, 갚을 수 없는 사람을 식탁으로 초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 시리즈를 준비하며 저는 무엇보다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그분이 가르치시고 걸으신 길을 실제로 얼마나 가까이 따라 살아왔는지를 아프게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어 놓은 차별과 배제의 선 밖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셨지만,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가 그어 놓은 선 안으로 모셔 와 우리 편의 주님으로 만들려 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나누었던 스물여섯 편의 설교는 단순히 우리 안에 감추어둔 또는 대놓고 드러내는 선을 지적하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예수님께서 서 계신 자리로 다시 나아가라는 부르심입니다. 세상이 또다시 사람 사이에 선을 그을 때 그 선을 먼저 넘어가신 예수님을 따라 용기 있게 나아갑시다. 그분을 따라 목소리를 빼앗긴 사람 곁에 멈추고, 먼지 묻은 발 앞에 무릎 꿇으며, 서로에게 든든한 믿음의 가족이 됩시다.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 시리즈 설교는 오늘로 끝나지만,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그 이야기는 우리 자유교회의 말과 손과 식탁과 관계를 통해 계속되어야 합니다.

 

바라기는 자유교회가 앞으로 걸어갈 새로운 세월 동안, 누구도 쓸모로 평가받지 않고, 누구의 목소리도 지워지지 않으며, 누구도 가족 없이 홀로 남겨지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삶으로 보여주는 교회로 자라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