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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허무시는 예수님20-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 사이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 사이

마태복음 18:23-35

 

마18: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18: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마18: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마18: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마18: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마18: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마18: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마18: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마18: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마18: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마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마18: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마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오늘은 “선을 허무시는 예수님” 시리즈 20번째 시간으로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 사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도 전하는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과 깨달음, 그리고 변화된 삶을 향한 영적 도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두 번의 설교를 통해 우리는 “원한의 선”을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 설교에서 요셉은 자신에게 악을 행한 형들에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원한의 선을 허문다는 것은 상처를 덮거나 악을 없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받은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최종 심판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설교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됩니까?” 그러나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은 490번까지 세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상처를 숫자로 바꾸고, 그 숫자를 심판할 권리로 바꾸는 원한의 계산기를 내려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심판자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원한의 계산기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음처럼 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사람의 얼굴이나 그날의 일이 떠오르면 마음은 다시 굳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받은 상처는 빠짐없이 기억하면서도, 받은 은혜는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우리의 기억 때문입니다. 상처를 기억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상처의 기억이 다른 모든 기억을 압도하고, 받은 은혜마저 밀어내는 것입니다. 원한은 아픈 기억이 존재하는 상태가 아니라, 그 기억이 내 삶과 사람을 해석하는 유일한 기준이 된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의 비유는 바로 이 뒤틀린 기억의 질서를 드러냅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진 백 데나리온은 갈수록 선명해지는데, 내가 탕감받은 일만 달란트의 은혜는 갈수록 희미해집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기억 위에 서 있습니까? 백 데나리온의 상처 위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일만 달란트의 은혜 위에 서 있습니까?


예수님의 비유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마태복음 18장 24절입니다.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비유에 따르면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빚을 진 종이 있었습니다. 한 달란트는 약 6천 데나리온이고,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따라서 일만 달란트는 약 6천만 데나리온입니다. 한 사람이 하루도 쉬지 않고 6천만 일을 일해야 갚을 수 있는 돈입니다.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어려운 액수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과장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엄청난 액수를 과장하여 말씀하신 것일까요? 단지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지를 계산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자기 힘과 공로로는 결코 모든 것을 결산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제법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았고,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았으며, 교회도 다니고 봉사도 했으니 다른 사람보다 크게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낫다는 비교가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빚의 상대적인 크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그것을 갚을 능력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임금 앞에 엎드려 구합니다. 마태복음 18장 26절입니다.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종의 간청은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과 가족이 팔려 가는 파국을 어떻게든 막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을 조금만 더 주면 모든 빚을 갚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심이면서도 불가능한 약속이었습니다. 그의 문제는 갚으려는 의지가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많은 시간을 얻어도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힘으로 자신과 가족을 구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종의 간청을 들은 임금이 어떻게 합니까? 마태복음 18장 27절입니다.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임금은 시간을 더 주지 않았습니다. 갚을 금액을 조금 줄여 주지도 않았습니다. 대신에 임금은 종을 불쌍히 여기고 그가 진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종이 구한 것은 유예였지만, 임금이 베푼 것은 탕감이었습니다. 종은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지만, 임금은 이제 아무것도 갚지 않아도 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용서는 유예가 아닙니다. 조금씩 갚으라는 할부도 아닙니다. 탕감입니다. 그것도 전액 탕감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용서받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다른 사람보다 더 착하거나 도덕적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시며, 다시 살아갈 미래를 열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비유에서 일만 달란트는 인간의 절망을 보여 주는 숫자인 동시에, 그 절망보다 더 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그는 더 이상 빚에 붙잡힌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임금의 긍휼로 자유를 얻었고, 이제 탕감받은 사람답게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이것이 그가 평생 기억해야 할 가장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나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이다.” 이 기억이 그의 말이 되고, 그의 손이 되고, 그의 관계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가 받은 은혜는 개인적인 안도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 되어야 했습니다. 은혜를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에 탕감받은 사실을 머리로 떠올리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 은혜가 오늘 나의 말과 손과 관계를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원한은 우리를 잘못된 자리에 앉히고, 잘못된 계산을 하게 하며, 마침내 잘못된 기억 위에 살게 합니다. 하지만 신앙은 은혜의 기억 위에 인생을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살리셨는지를 기억하는 자리입니다. 말씀은 망각에 빠진 우리의 영혼을 깨우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몸으로 기억하는 식탁입니다. 찬송과 기도는 내가 내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님을 고백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종이 임금의 궁전을 나서는 순간, 자신이 받은 탕감을 삶의 방식으로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8절입니다.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안타깝게도 그는 탕감받은 사람으로 살아가지는 못했습니다.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나는 순간, 임금에게 받은 은혜는 보이지 않고 동료가 갚아야 할 빚만 보였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100일 치 품삯입니다.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몇 달 동안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이고, 가족의 생계가 달린 돈입니다. 비유에서 백 데나리온이 큰돈인 것처럼, 우리가 사람에게 받은 상처도 큰 아픔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 정도 상처로 왜 그러느냐?”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더 깊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는 백 데나리온의 아픔만 기억하고, 일만 달란트의 은혜는 잊은 채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 조금 전까지 종은 임금 앞에 엎드려 두 손을 모으고 자비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궁전을 나와서는 그 손으로 동료의 목을 잡았습니다. 은혜를 구하던 손이 폭력의 손이 된 것입니다.


그는 엄청난 빚을 탕감받았지만, 탕감받은 사람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임금 앞에서는 긍휼을 구했지만, 동료 앞에서는 자비 없는 채권자가 되었습니다. 은혜의 문을 통과했지만, 그 은혜가 그의 말과 손과 관계까지 들어오지는 못했습니다.


원한의 선은 단순히 상처를 기억할 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받은 상처가 내 삶의 주도권을 쥐고, 받은 은혜가 더 이상 나를 움직이지 못할 때 생깁니다. 내가 받은 은혜보다 내가 붙들고 있는 상처가 더 크게 보이는 바로 그 자리에 원한의 선이 그어집니다.


비유 속 동료도 땅에 엎드려 간청합니다. 마태복음 18장 29절입니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놀랍게도 동료의 말은 조금 전 자신이 임금 앞에서 했던 말과 거의 같습니다. 그는 그 말에 담긴 두려움과 떨림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입에서 나왔던 말을 다른 사람의 입에서 들었을 때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은혜의 기억이 그의 말과 손을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간절함을 알아봅니다. 내가 살려 달라고 울었던 기억이 살아 있다면, 다른 사람의 “참아 달라”는 말 앞에서 적어도 잠시 멈춰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은 동료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원한의 감옥에는 역설이 있습니다. 상대를 가두려던 나 자신도 그곳에 함께 갇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한번 말했지만, 원한은 그 말을 내 마음속에서 백 번 다시 들려줍니다. 그 사건은 한 번 일어났지만, 원한은 그 장면을 끊임없이 다시 살아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한의 선을 넘으라고 하시는 것은 가해자를 편하게 해 주거나 상처를 없던 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원한의 감옥에 갇힌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모든 소식을 들은 임금이 종을 다시 불러 말합니다. 마태복음 18장 33절입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임금의 질문은 단순히 왜 용서하지 않았느냐가 아닙니다. 너는 왜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일을 네 삶의 방식으로 삼지 않았느냐? 너는 왜 탕감받은 사람으로 살지 않고 여전히 채권자로 살아가느냐? 묻는 것입니다.


비유의 마지막은 무겁습니다. 임금은 자비를 거부한 종을 옥졸들에게 넘깁니다. 예수님도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 아버지께서도 이처럼 하실 것이라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마태복음 18장 35절입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음으로부터 용서한다는 것은 상처의 감정이 즉시 사라져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음 깊은 곳에 세워 둔 심판대에서 내려와, 상대방을 영원히 내 판결 속에 가두려는 권리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만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은혜는 우리의 행위로 얻는 대가가 아닙니다.


그러나 참으로 받아들인 은혜는 반드시 삶에 흔적을 남깁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지만, 우리를 이전과 똑같은 사람으로 내버려 두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단지 용서의 윤리를 가르치는 말씀이 아닙니다. 탕감받은 사람이 어떤 기억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람은 상처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받은 은혜가 상처보다 더 깊이 삶에 뿌리내린 사람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용서해야 한다는 더 강한 의지나 결단이 아닙니다. 더 깊은 기억입니다. 나는 오늘 어떤 기억 위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있습니까? 누군가 내게 준 상처로 움직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로 살고 있습니까?


이민 교회는 가족처럼 가깝기에 더 깊이 아프기도 합니다. 누가 나를 무시했는지, 누가 내 헌신을 알아주지 않았는지, 누가 우리 가족에게 상처를 주었는지를 오래 기억합니다. 교회가 서로의 백 데나리온만 붙들고 살면, 교회는 빚 독촉의 사무실이 됩니다. 누가 누구에게 얼마를 빚졌는지 끝없이 계산하는 원한의 공동체가 됩니다.


교회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들이 함께 앉는 은혜의 식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식탁에서는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모두 빚진 사람이었고, 모두 긍휼로 살아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처 입은 사람에게 성급한 용서를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원한이 그 영혼을 갉아먹도록 방치해서도 안 됩니다. 상처 입은 사람의 곁을 지키며, 함께 하나님 앞에 서고, 함께 은혜의 기억을 되찾도록 도와야 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 사이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는 임금 앞에서는 탕감받은 사람이었지만, 동료 앞에서는 채권자가 되었습니다. 엄청난 은혜를 받았지만, 은혜의 기억으로 살지는 않았습니다.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긴다는 속담이 바로 우리 안의 뒤틀린 기억의 질서를 꼬집는 말입니다. 일만 달란트의 은혜는 흐르는 물처럼 쉽게 잊으면서, 백 데나리온의 상처는 마음의 돌판에 새겨 오래 붙드는 것이 우리 기억의 뒤틀린 질서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빚을 붙들고 자기 영혼을 원한의 감옥에 가두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다시 십자가 앞으로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세상의 질서를 정반대로 뒤집습니다. 상처는 하나님께 정직하게 내어놓고, 그 상처가 원한이 되어 우리 영혼을 붙들지 않도록 은혜의 강물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쉽게 잊히는 일만 달란트의 십자가 은혜는 예배와 말씀, 찬송과 기도로 날마다 마음 깊이 새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백 데나리온의 상처를 들고 일만 달란트의 은혜가 드러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상처를 하나님께 정직하게 내어놓고, 원한은 은혜의 강물에 맡기며, 받은 은혜는 마음 깊이 새기는 영적인 싸움이어야 합니다. 상처의 기억이 내 영혼의 주인이 되지 않게 해 달라고, 심판자의 자리에서 내려와 탕감받은 사람의 자리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백 데나리온의 상처는 실제입니다. 그러나 일만 달란트의 은혜도 실제입니다. 우리의 아픔은 깊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더 깊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가 서로의 백 데나리온을 붙드는 공동체가 아니라,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들이 서로의 손을 잡는 은혜의 식탁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의 신앙이 원한은 물에 새기고 은혜를 돌에 새기며, 십자가의 기억으로 참된 자유를 향해 걸어가는 여정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